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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영전(잃前)을 향하여 조례(멈禮)를 행하고 나왔다. 그들은 대한문 앞 광장 에서 독립 연설회를 가진 다음,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일대는 정동(貞洞)으 로 틀어가 미국영사관(美國領핀館) 앞으로 행진하고 일대는 구리개(지금의 ζ支路) 방면으로 가고, 일대는 일본인들의 거 리 인 진고개 (지금의 많、武路) 방 면으로 행진하려다가 일경에게 저지되어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일대는 종로에서 광화문통(光化門通)을 지나 경복궁(옳福宮) 방 면으로 행진하였고 다른 일대는 창덕궁(昌德宮) 쪽으로 행진하였다. 이 같은 만세시위 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 나갔다. 오후 8시경에는 마포(따녀市) 전차 종점 부근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이 일 어났고,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는 밤 11시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이 날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운동은 해가 저물-도록 서울 거리 를 휩쓸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독립 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수십만 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지상명제 (至上 命짧)인 독립의지를 표시하는 것이 3· 1독립만세운동의 정신띠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는 군국주의 (펴國主義)의 특색인 무력으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경찰과헌병 외에도용산(龍山)에 있는보병 3개 중대와기병 l개의 중 대를 동원해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태화관에서의 민족대 표 29명을 비롯한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되었다. 3월 1일에 독랩만세 운동을 벌린 곳은 서울뿐이 아니었다. 평양·진남포(鎭 I힘해)-안주-의주(義)‘|‘|) - 선천(宣”|) ‘원산(元山) 둥 대체로 서울 이북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서울과비슷한형태의 독립선언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도시가 서울과 같은 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경의선(京義 제3 장 _3· l독럽만세 운동의 전개 -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