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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70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운 일제의 토지약탈계획을 막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일본의 의도 가 마침내 좌절된 것은 바로 이 활동 때문이었다. 뒤를 이어 1905 년 결성된 것이 헌정연구회였다. 이는 일제침략에 대항하는 것과 더불어 근대적인 정치체제로의 개혁을 내세워 입헌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헌정연구회마저 금지되자 1906년 대한자강 회로 바뀌었다. 대한자강회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교육과 식산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한자강회는 25개 정도의 지방지회를 갖추었을 뿐 아 니라 회원구성도 도시의 지식인, 봉건관료층을 벗어나 지방의 상 공인‧지주‧유생층 등을 모두 포괄하였다. 이리하여 대중적인 기 반을 갖춘 대한자강회는 광무황제 퇴위를 반대하며 대규모 반일 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통감부는 이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조직되 었다. 대한협회는 애국사상 고취와 교육을 통한 민권 향상, 식산 흥업을 통한 경제적 발전 등을 목적으로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갖출 만큼 넓은 지지를 받아 계몽운동 을 지방 곳곳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지 역에 따라 구성원이 다양하다보니 주장도 달랐고, 일진회와 같은 친일세력도 들어 있었다. 이 시기 안동 인사들 가운데 서울에 가서 계몽운동으로 가는 과 정에 발을 딛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기의병에 참가했다 가 서울로 가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인물들이 점차 변화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변화 흐름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