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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362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안정’에 집중되어 있었고, 자연히 농민들의 실제 입장과 권익은 상 대적으로 경시되었다.23) 이에 따라 과도한 실적주의에 집착한 ‘강 제농정’이 거의 일반화되었고, 당시 농민들은 신품종 벼의 강제 재 배, 일반벼의 재배 방해, 초가지붕 강제 철거, 주택 개량 강요, 경지 정리와 객토사업 강제, 곡물 수매량 제한, 하천사용료 부당 징수, 경 지정리의 피해, 농지세의 부당 징수, 외국 농축산물 수입 등 사면초 가에 몰려 있었다. 1차 경제개발계획 때부터 이어진 농업 희생으로 이농은 그칠 줄 몰랐으며 유신체제의 강압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횡 포와 압박에 맞서는 피해 보상 요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경북지역에서도 부당한 농업세제와 농협 비료 구입시 출자금 강 제 징수, 신품종 벼와 강제 경지정리, 수세와 농지제 문제 등이 과 제로 부상하였다. 당시 의성 다인 ‧신평, 예천군, 영양군 청기면 등 에서 ‘벼품종 선택권 쟁취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시기 안동 가톨릭농민회의 주요 활동은 주로 농협의 민주화와 농지세 부당 징수에 집중되고 있었고, 당시 함평고구마사건과 더불어 지역 농 민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꼽혔던 ‘감자 피해 보상 활동’도 이 시기 에 전개되었다. 안동 가톨릭교회는 1969년 6월 대구교구에서 분할되어 경북 북 부지역을 아우르는 안동교구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 당시 목성동 성당이 교구 본당이 되었고, 당시 교구장은 프랑스 신부인 두봉 주 23) 《경향신문》 1974년 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