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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192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 175 1편 정치 일제가 침략전쟁의 승리를 위해 수탈과 탄압을 강화해 갈수록 오히려 학생들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리고 민족운 동을 전개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은 민족운동의 방략에 대 해 의견을 나누었다. 논의에서는 실력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 장이 우세했으나 무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안동에서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중심 이 된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과 명성회明星會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무력투쟁을 계획하였다. 1933년 4월 개교한 안동농림학교는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바뀌었 다. 일제 군인이 학교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시키고 소년비행대와 전차대 지원을 강요하였다. 1943년에는 재학생들이 신체검사를 받 고 소년 항공병으로 입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학생들은 침략전쟁 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대구의 동촌비행장을 비롯 한 군사기지의 건설에 동원되거나 내선일체 이념을 선전하기 위 해 건립 중이던 부여신궁扶餘神宮 건설에 강제 동원되어 ‘근로봉사’ 를 하였다.54) 1943년 7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여름방학임에도 불구하고 농 촌실태조사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동원되어 근로봉사를 하였다. 이 54) 김을동, í��안동판독립사��, 명문사, 1985, 329-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