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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192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 145 1편 정치 작농민이었기 때문에 풍산소작인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안 동의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하여 봉건적 신분질서를 타파하기 위 해 전개된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22) 각 면 단위의 청년회는 활동을 계속했지만, 안동청년연맹은 결성 이후 일제 경찰의 집회 금지로 활동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23) 안동의 청년단체들이 계급운동의 성격을 강화시키는 가운데 1920년대 후반기에 청년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사건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고 사회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사회 주의 세력은 위기를 극복하고 운동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파벌투쟁을 극복하여 운동의 통일을 꾀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운동의 동맹자로 받아들여 적극 제휴하는 방향으 로 전환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의 방향전환은 청년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무산계급 청년을 중심으로 삼았던 이전의 청 년운동을 비판하고,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청년에게도 문호를 개방 하는 전민족적인 청년운동의 방침을 결정하였다.24) 조선청년총 22) 「칼, 로사 기념 안동에도 금지」, 《시대일보》 1926년 1월 19일자; 심상훈, 「1920 년대 안동지역의 청년운동」, í��안동사학��2, 안동사학회, 1996, 134-135쪽. 23) 「安靑聯盟 해체」, 《동아일보》1927년 4월 19일자. 24) 허종, 「1920년대 경북 영덕지역의 청년운동」, ��대구사학��82, 대구사학회, 2006, 132-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