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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의 큰 강의 범람과 재해도 없으며 발길 닿는 데마다 작은 하천이 있어서 관개가 편하고 오 곡이 풍성한 반도 중앙부의 대보고 ( 大寶庫 ) 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1910 년대 수원에는 철도와 자동차 등의 교통시설이 완비되어 가면서 교통중심지가 되 면서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 특히 일제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권업모범장이 설치되어 농업계의 중추 도시가 되면서 , 수원지방에는 단시간에 많은 인구 가 집중되게 되었다 . 수원지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 1901 년 경 수원성을 중심으 로 인구가 약 8 , 000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 1914 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일어나기 전인 1912 년 수원군의 인구는 87 , 881 명이었다 .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 이후인 1915 년에는 남 양군의 일부가 수원군에 합병되면서 43 , 448 명이나 늘어난 128 , 750 명이 되었다 . 1912 년 에서 1915 년 사이에 남양군의 인구를 합산하더라도 수원군의 인구증가는 가히 폭발적이 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 1910 년부터 1915 년까지 전국적인 인구 성장률을 각각 1 . 05 %, 1 . 00 %, 1 . 37 %, 1 . 23 %, 1 . 42 % 로 가장해 보면 , 1913 년에 1 . 23 % 증가한 88 , 962 명 , 1914 년에 는 1 . 42 % 증가한 90 , 225 명에 불과해야만 한다 . 그러나 1915 년에 수원군의 인구는 1914 년 행정개편을 감안하더라도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되었다 . 1925 년 전국적으로 인구조사가 정확하게 실시되면서 수원군의 호수는 2 만 7 천여 호 , 인구는 14 만 7 천여 명 이었다 . 1922 년 수원의 논과 밭의 비율은 6 : 4 로 논이 많았고 , 1930 년대도 이 비율은 거의 비슷 하였다 . 수원에서 경지면적이 가장 많은 곳은 반월면이며 , 태장면 , 우정면 , 안룡면이 2 천 정보가 넘는 경지면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 경지의 소유별 면적을 보면 , 1922 년에 자작지 비율은 32 . 6 %, 1930 년에 27 %, 1933 년에 28 % 였다 . 이 중 논의 자작지 비율은 약 1 %, 밭은 3 . 7 % 가 감소하였다 . 반면 소작지 비율은 1922 년에 67 . 4 %, 1930 년에 73 %, 1933 년에 72 % 로 증가하였다 . 자작지는 감소하고 소작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으로 1920 년대 일제가 실시한 산미증 식계획으로 자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수원군의 농업인구는 1922 년 조사에 의하면 총호수의 83 . 5 % 를 차지하였다 . 그것을 구 성면에서 살펴보면 소작농이 53 %, 자소작 겸소작이 37 %, 지주가 4 . 3 %, 자작농은 겨우 6 . 85 % 에 지나지 않았다 . 수원은 경지구성상 논이 60 % 를 차지하는 벼농사지역이라고 할 수가 있고 , 벼농사를 주 로 하였으며 , 보리와 밀도 경작하였다 . 1930 년 조선농회에서 조사한 수원의 영농구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