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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민온 일본인 등이었다. 그 결과 일본 재류민들과 관리들의 불안이 확산되어 철수하거나 사의를 표 하는 자들이 잇따랐다. 113) 다음으로 호남창의회맹소는 일진회원의 제거와 납세거부투쟁에 적극적이었다. 114) 일제는 이들이 일 본인을 공격하고 일진회원들을 처단하는 한편 납세거부투쟁을 주도함으로서 일본인들의 두려움의 대 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세금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더욱 확산하기 위하여 납세거 부투쟁과 세무관리와 일진회원의 처단 등을 강조하는 고시문을 자주 유포시켰다. 115) 한편, 호남창의회맹소는 상황에 따라 合陣과 分陣을 번갈아 하였다. 116) 이들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17) 이를테면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 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 지역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경 이들은 의병 장과 통령을 비롯한 선봉·중군·후군 등 약 4-5개의 의병부대로 분진하였다. 이들이 합진하였을 때 의 규모는 약 500명 정도였으며, 118) 분진시 규모가 큰 의병부대는 약 200명 선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 다. 119) 이에 맞서 일제는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1908년 1월 광주수비대는 10개 縱隊를 편성하여 호남창의회맹소의 근거지 색출에 나섰다. 120) 당시 광주수비대는 경찰 병력과 합동으로 전라북도의 무장과 순창, 전라남도의 장성 영광·남평·나주를 거쳐 함평의 연안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작전을 펼쳤다. 121) 그러나 당시 일제의 의병진압작전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남부수비관구 사 령관 쓰네요시(恒吉) 소장은 대구에 주둔중이던 14연대장 기쿠치(菊池) 대좌로 하여금 직접 호남의병 의 뿌리를 뽑으라고 명령하였다. 1월 이래 경상남도·전라남도에 있어서 폭도의 跳梁은 점차 활발하여져 누차 헌병 경찰 관서를 습격 하고 각지의 수비대가 이를 토벌하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2월 초순 남부 수비관 구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장 기쿠치(菊池) 대좌에게 그 지방의 토벌을 명하였다. (중략) 207명을 사 113) 『폭도사』, 33 35쪽 참조. 114) 『편책』,『독운사』9, 26쪽. 115) 『편책』, 『독운사』 8, 522-524쪽·같은 책 9, 267-268쪽 참조. 116) 「의사 김준 전수용 합전」, 『호남의병장열전』 ; 『자료집』 2, 641쪽. 117) 홍순권, 앞의 책, 103쪽. 118) 大韓每日申報 1908년 1월 16일자 「雜報」 및 『편책』, 『독운사』8, 519쪽 참조. 119) 1908년 2월 1일자로 羅州警察分署長이 內部 警務局長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金聿 의병부대의 加盟名簿가 피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맹명부에는 김율을 비롯한 167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편책』, 『독운사』 9, 184∼192쪽). 김율은 선봉장 김준의 동생으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될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김준 의병부대는 軍勢가 급증 하자, 이를 다시 나누어 일부 병력을 김율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의사 김준 전수용 합전」, 『호남의병장열전』 ; 『자료집』 2, 641쪽). 그후 1908년 1월 하순경 김율 의병부대의 가맹명부가 일제에 의해 被奪됨으로써 부대원의 명단과 규모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이들이 分陣했을 경우의 규모를 약 200명 내외로 추산할 수 있다. 120) 『폭도사』, 34쪽과 『편책』,『독운사』 9, 33쪽. 121) 『폭도사』, 34쪽과 『편책』, 『독운사』 9, 26-27·3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