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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奇參衍은 의병을 도모하다가 1902년 5월에는 全州鎭衛隊에 체포되어 서울까지 붙잡혀 갔다가 방 면 되 었 다. 45) 장 성 의 병 을 주 도 하 였 던 기 우 만 은 전 기 의 병 이 해 산 된 이 후 인 1896년 음 력 5월에 정부의 事後措置가 미흡하다는 점을 들어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 당시 그는 국왕에게 ‘還宮車·復舊典·革新式·進舊臣·退時輩·開言路·扶士氣’를 주장하였다. 46) 그러나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春秋의 義理에 입각하여 喪服을 입고 생활하였다. 47) 한편, 전기의병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倡義를 모색하였다. 崔益鉉·白樂九·梁漢奎·梁會一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거의목표를 살필 수 있는 인물로는 최익현과 백낙구, 양회일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勉菴 崔益鉉(1833∼1907)은 호남지방의 중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백낙구는 최익현의 門人으로서 면암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며, 양회일은 綾州의 대표적인 유생이었다. 따라서 중기의병의 거의목표는 기삼연·기우만·최익현·백낙구·양회일 등과 관련된 자료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삼연의 경우에는 이 시기에 해당된 격문이나 통문 등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시기에 그가, ‘꿈에도 왜놈을 토벌하는 詩를 지었고, 醉中에도 왜적을 토벌하는 檄文을 지어서 가위 卷이 되고 軸이 되었다’ 48) 라고 말한 점에서 그의 思想의 一端을 짐작할 수 있다. 석방된 후에 그는 內政의 改革을 요구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의 外攘論이 일시 潛在되고, ‘內修’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奇宇萬의 경우에는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대체로 ‘內修’에 치중하였다. 그가 敎育과 鄕約의 권장에 관심을 쏟았던 점으로 볼 때 그러하다. 49)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상소를 통하여 일본을 성토하는 한편, 賣國五賊을 斷罪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50) 그는 상소에서 국토와 민족의 보전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는,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성리학적 道를 수호하면 그만이라는 종래의 그의 사상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列强의 公使館에 일제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 해결방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무산되자, 그는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얻으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좌절되었다. 51) 그리하여 1906년 초에 그는 谷城의 45) 변상철·변만기, 『봉서·봉남일기』, 503쪽과 「湖南義兵將列傳」, 『자료집』 2, 632쪽 참조. 46) 「松沙集」, 『자료집』 3, 839쪽 참조. 47) 위와 같음, 36쪽. 48)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620쪽 참조. 49) 「송사집」, 『자료집』 3, 35 40-41쪽 참조. 한편, 그가 斥邪(外攘)를 실현하기 위해 전기의병을 주도하였다가, 그후 다시 衛正(內修)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무력투쟁의 현실적 한계를 인식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그가 주도한 長 城義兵은 대부분 儒生들로 구성되었으므로 군사적 기반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전투에서 이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黃玹, 『梅泉野錄』, 198쪽). 그와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와 충청도를 무대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의 경우에도 전기의병이 해산된 이후에 그러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는 戰略의 不在와 武器 의 劣勢 그리고 군자금의 부족 등을 의병봉기시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던 것이다(「柳毅菴 麟錫 自明疏」, 『念齋野 錄』 坤, 권 5<1950> 참조). 이들은 전기의병이 해산된 후에 향약을 부흥시켜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外攘’보다는 ‘內修’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주는 一例라 하겠다. 50) 「乙巳疏」, 『松沙先生文集』 1, 293-297쪽과 「告列邑諸章甫」, 같은 책 2, 351-353쪽 그리고 「송사집」, 『자료집』 3, 42-44쪽 참조. 51) 「송사집」, 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