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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군수물자의 확보가 가장 절박하고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영호도회소의 본부를 중심으로 군량과 옷, 신발 등을 각 지역별로 할당하여 징발하였으며, 부호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얻어내기도 하였다. 375) 그런데 순천과 인접한 낙안군의 경우에는 영호도회소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았다. 낙안군수가 성내의 향리와 주민들을 결속시켜 농민군에 대하여 비협조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민군들은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결국,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梁河一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을 규합하여 낙안읍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양하일 등은, 낙안이 보성과 고흥 순천의 중간에 위치하여 만약 이곳에서 농민군 세력이 물러나기 시작하면 그 여파가 바로 인근지역에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 또한 그는 낙안읍성을 점령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할 목적이었다. 양하일은 순천지방의 토호로서 원래 순천에서 군수물자를 징발하려 하였으나, 부친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이에 영호도회소에 비협조적인 낙안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376) 그리하여 음력 9월 15일(10. 13) 양하일은 중간지점인 선암사에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집결시켰다. 농민군은 어둠이 깔리자, 선암사를 출발하여 낙안을 향하였다. 오금재를 넘어 낙안에 이르러 야간에 기습공격을 단행하였다. 낙안군수 張敎駿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보고하였다. (음) 9월 15일 戌時頃 동학배 1천여 명이 순천 선암사에서 각자 총과 창을 들고서 본군 吏校廳에 난 입, 포성이 진동하였습니다. (중략) 이튿날 새벽 본읍 義所 역시 성을 구하고자 성밖에 취회하여 대 치, 18일 未時頃 저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화살을 비오듯 퍼붓고 함성이 진동하자 본읍 의소에서 이 를 감당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습니다. (중략) 19일 申時頃 그들은 군기고를 방화한 다음 서 문을 열고 대부분 선암사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각 마을로 흩어져 들어갔으나, 아직 그 피해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듣건대, 저들은 혹 順天接 혹 高山接 혹 南原接 혹 泰仁接 혹 金溝接이라 하였습니 다.(『고문서』 2, 413쪽) 이상에서 알수 있듯이, 농민군은 비교적 손쉽게 낙안읍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낙안군수 등의 수성군측은 이른바 義所를 만들어 다음날 다시 낙안읍성을 차지하려 하였으나, 농민군의 방어가 견고해서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군수품을 확보한 다음 선암사로 유유히 퇴각하였다. 그런데 낙안읍성 공격에는 매우 다양한 농민군 부대가 참여하고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순천 고산 남원 태인 금구접 등 주로 전북지역의 東學包가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영호도회소는 전북과 전남 지역의 농민군이 연합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375)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80쪽. 376) 황현, 『번역 오하기문』, 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