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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하였다. 사발통문에 서명하고 갑오년 정월 고부봉기를 주도하였으며 그해 삼월 백산봉기때에 영솔장으로 추대되었다.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을 점령할 때 큰 공을 세웠고 삼례2차 봉기때에는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해서 손화중과 함께 광주에 남아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패하고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자 나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최장군은 갑오년 12월 동복 벽성리에서 관군과 싸우다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1895년 3월 30일 최후를 마쳤다. 장군은 부친이 큰 벼슬을 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억눌린 민중을 위해 의를 행하였으니 옛 성현의 뒤를 따랐다 할 것이다. 삼례봉기때 만삭이던 부인을 두고 출정하였더니 그때 낳은 아들 연식은 어려서 죽고 딸 둘은 이가춘과 박창규에 출가하였다. 평소 죽음을 각오한 최장군은 윗조고리 앞섶에 성명을 적은 천을 품고 다녀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약속하였다는데 처형당한 후 맏형 영대가 밤중에 산길로만 시신을 운구하여 고부 시동에 묻었다가 얼마 후에 이곳 축현리 조왕곡으로 모셨다. 그후 여섯째 아들 종식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축현리 조왕곡 임야를 종식 명의로 매입하였으며 최장군의 손자 명언이 기적적으로 그 묘를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