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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순회 안산읍을 향하여 돌진하니 중도에서 호응합세한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2,000여명에 달하였다. 일경춘사부장과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등이 혼비백산하여 겁결에 뛰어나와 대한독만세를 외쳤다. 면사무소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향교를 거쳐 면내 각처를 돌며 시위하니 우리의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각성케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선생은 그 다음날인 3월 31일 반월면에서 시위를 벌이니 많은 사람이 호응합세하여 각 부락을 돌며 시위를 벌이었으며 그 여세로 남양까지 진입하니 그 위세는 충천하였다. 선생은 시위가 사작할 무렵부터 군중들이 몽둥이와 돌을 몸에 지닌것을 발견하자 크게 소리쳐 건물이나 기물은 모두가 우리 대한민국의 재산이니 하나도 파손치말라고 호령하시니 군중은 일제히 버리었다. 또 선생은 봉기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하셨으니 족손되는 유철형등 4,5명의 청년을 시키어 성포리 노적봉에 숨어서 태극기 수천매를 제작케 하였고 사재를 털어 동지와 군중에게 주식을 제공하시었으며 각부락마다 높은 산정에 봉화를 올리게 하시니 그 화염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선생은 서기 1919년 4월 5일 월파리 자택에서 태연자약한 자세로 일군경에게 피체되니 그해 5월 27일 보안법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으나 여서인 김정규의 주선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8월 31일 1년형의 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선생께서는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고로 6년을 고생하시다 서기 1926년 4월 18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다. 서기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