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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에서 윤병소·윤동욱·유익수·김병권·이봉문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다음날인 3월 30일 비입동에 집결하기로 하여 주민들에게 통고한 결과 2,000여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윤익수·윤병소 등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군중이 따라 독립만세를 화창하여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공자묘를 돌며 시위를 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