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age

라고 부탁하였다. 면장 안병혁은 임대규(林大포 )와 면서기 이경응과 같이 장터에 있는 송희진 집으로 가서 이담 선생이 부르는 대로 면서기 이경응 이 받아서 썼는데, 그 내용은 <금일 시장에서 순사 때문에 죽은 이은선의 사인(死因)을 주재소에 가서 질문코자 하니 죽은자에 동정하는 사람은 오 후 12시까지 면사무소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주민들은 웅 성거리면서 200여명이 면사무소에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경응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이담 선생의 생각으로는 이경응이 고급서기로서 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자는 일본말 을 하므로 순사에게 이은선을 죽이라고 교사한 것 같은데 무엇인가 원인 이 있어 오지 않은 것 같다고 하여 이경응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얼마 후 찾으러 간 사람이 집에 없다고 하여, 다시 김영권과 박윤칠을 보내 봤 으나 역시 집에 없다고 하여 이번에는 면장이 직접 찾아가 보았으나 역시 집 에 없으므로 그냥 되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이담 선생은 면서기 이경응이 죄가 있어서 피한 것으로 단정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 ‘아니 되겠다 이제부터 이경응의 집을 부시러 가 자’ 하며 ‘면장 너도 가자’고 등을 미는 고로 100여명이 캄캄한 밤중에 선 주지리 이경응 집으로 몰려가서 최성옥 · 전원순 등이 앞장서서 집과 가구 들을 닥치는 대로 부셔 버렸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된 인천경찰서 부내주재소(富 |지밥在所 : 현재 계산 동)의 주임 순사부장 니미야(二宮喜三次)는 인천경찰서로 3월 25일 이 사 실을 보고하는 동시에 지원부대를 요청하여 지원순사 10여명이 무장을 하 고 출동하여 이 사건에 가담했던 100여명을 검거하여갔다. 부내주재소에서 순사들이 총을 들고 파수를 보는 가운데서 일일이 취조 를 하여 그 중에서 범행 용의자 29명을 포승줄로 줄줄이 엮어 삼엄한 경 계 속에 인천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인천경찰서에서는 이 사람들을 감방에 가두고 배후를 추궁하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계양면민들은 엄청난 고통의 고문을 받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담 선생도 이때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919년 10월 29일 경성지방법 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 소요 · 훼기(없棄) . 직무집행방해 죄목으로 징 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6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