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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黃州) 사람이다. 대표저작으로 「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손꼽을 수 있는 민족사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지낸 독립운동가이고, 「황성신문」, 상해 「독립신문」, 「한족공보」의 주필, 사장 등을 역임한 민족 언론인이다. 그의 생존기는 격동의 시대였고, 그가 만년에 봉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은 곧 독립운동의 최고봉이었다. 그는 중키에 악골(顎骨)이 좀 튀어나왔으며 항상 미소짓는 강직 온화한 얼굴이고 관후(寬厚)하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67세의 생애 중 전반생이 넘는 40세 때까지의 그의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적다. 단지 대원군의 집정시대에 유년기를 보냈으며, 문호개방기에 소년기를, 20대의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면서는 신문명 수용의 개화풍경과 일·청·러 등 제국주의의 침입을 경험하였다. 그후 30대에 대원군과 명성황후, 수구당과 개화당 등의 파벌 항쟁과 자주성이 결한 근대 외교와 문명수용이 국가 사회를 위기 속에 몰아넣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런 사회 변동 속에서 그의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였다.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외세를 격퇴하며 근대사회를 건설하려는 방도가 그의 지향할 바임을 결심하여 이를 구국의 방도로 굳히고 먼저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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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활동이 표면화한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 고조되었던 만민공동회가 열린 1898년경부터였다. 이해 9월에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羅壽淵)·유 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이란 제호로 창간 보급하였는데 그는 장지연과 같이 주필에 취임하였다. 1900년에는 민족교육을 위하여 교육계에도 투신하여 유림의 태두 곽종석(郭鐘錫)·김창숙(金昌淑) 등과 같이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 국민교육 담당자를 집중 육성하였다. 그가 이같이 교육에 뜻을 둔 것은 관직을 탐내지 않고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애국 정신 때문이었다. 1905년에는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 배설(裵說)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이 되었다. 그후 그는 정치,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서북학회장, 서북협성학교 교장, 황성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서우학회를 조직하면서 민중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당시의 항일정치운동은 일제가 정치결사를 탄압하기 때문에 부득이 학회, 신문, 학교, 청년회 등을 위장으로 내걸고 항쟁하였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에는 국내에서 더욱 정치 사회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시 최남선과 더불어 서울 광문회(光文會)에서 저술(역사유학)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하에서 그대로 민족 운동을 잊은 채 칩거할 수 없었던 그는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은 고구려 환도성이 있던 곳이고 또한 발해의 서원 압록부의 고지이므로 첫 사업으로 민족 고대 발전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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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사서를 탐독, 연구함으로써 「동명성왕실기」, 「대동고대사론」,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개소문전(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생각은 서북간도를 비롯한 서북만주와 요동평야가 다 우리 민족의 고대 활동지였음을 증명함과 아울러 그곳에서 민족 문화를 처음으로 이룩했음을 밝혀 그곳을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지로 건설하려는 사려가 앞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3·1절 기념사에서 민족 조상의 내력을 알지 못하면 타민족에게 동화된다고 강조하고, 중국 하·은·주 3대에는 요동반도에도 우리 민족이 살았으나 그곳에 우리 조상이 그 내력을 잃은 까닭으로 우리 민족은 요동평야를 잃었을 뿐 아니라 적어도 1억이 될 인구가 2천만에 그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박은식은 서간도의 이 같은 사업을 한정 없이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가 쓴 책들을 윤세복(尹世復)과 더불어 간행한 후, 한족이 많이 이주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노령 연해주를 편력하고 곧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 등과 더불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총재에 추대되었다. 동제사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와 남북만주 및 연해주 등의 1백만 한족을 바탕으로 조직된 해외민족운동자들의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이 같은 활동을 하는 한편 1913년에는 상해로 가서 「안의사중근전」과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민족 사학가로서의 한 경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또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민청년들의 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우리 민족의 독립은 시기문제만 남았을 뿐 확실한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1894년 갑신이래의 항일운동의 모든 사실을 모아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사를 기고하고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1919년 4월 23일에 소집된 국민대회의 「한성정부」에서 그를 평정관에 선임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에 임명하여 민족언론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와 유학생파견 및 지도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서 조직하여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직하였으며, 1925년 3월에는 마침내 이승만대통령의 탄핵면직을 계기로 제2대 대통령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된 시기는 임정이 안팎으로 곤경을 겪던 시련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3·1독립운동 당시 고조되었던 국내외 독립운동이 시일의 경과와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표면 활동이 위축되어 가고 있었고 다른 한편, 1919년 러시아의 적화혁명이래 대두한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독립운동선상에 스며 들어와 독립운동을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욕을 떠나 먼저 임정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책임 지도체제를 국무령 중심체제로 헌법을 고쳐 공포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개헌이었다. 그는 일련의 독립운동과정에서 민족운동자의 결속을 주장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의 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