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page


186page

3.1 독립운동 성지(聖地) 대각사 대각사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용성(龍城)스님이 세운 절이다. 용성(龍城)스님은 48세인 1911년부터 1940년까지 빼앗긴 조선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열반하실 때까지 민중의 깨우침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전체를 다 던지고 거기에 전념하였다. 용성(龍城)스님은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서울 사동에서 선불교 교화사업을 맡아 일하면서 봉익동 1번지 일대를 사들여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를 세우고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12년 이때 김구 선생의 나이는 32세. 용성(龍城)스님은 49세이다. 1919년 김구 선생은 해주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인천감옥으로 이관되고 거기서 탈옥한다. 그리고 대신 부모가 투옥되고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그해 늦가을 마곡사(麻谷寺)에서 스님이 되고 圓宗(원종)이란 법명을 얻고 3년을 거기서 수행하였다. 금강산 평양 대보산 영천암 등에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환속하게 된다. 그 후 원종圓宗(원종) 김구 선생은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용성스님이 있는 대각사에 머물며 용성스님의 영향을 받아 우리 민족 살릴 대원(大願)을 세우고 보현행원을 실천할 행자가 되기를 스스로 다짐하였다. 후에 김구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고 용성스님은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곤 하였다. 용성(龍城)스님은 1916년 봄 만해(卍海)스님을 불러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주 묻곤 하였다. 만해선사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대각사에 머물면서 용성(龍城)스님께 시국 돌아가는 말씀을 나누고 차후 거사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때쯤 손병희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물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에 밀사를 보내 독립운동을 하고 또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조선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일을 할 때였다. 용성스님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였고, 이것을 문제 삼아 2년여 간의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다 치렀다. 출소 후 용성스님 께서는 경전 번역과 전법, 그리고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경남 함양의 화과원(華果園) 운영, 만주 용정에 27만여 평의 농지를 구입하여 화과원(華果園)을 운영, 잉여농산물은 모두 독립자금과 만주독립군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 일로 후일 1931년에는 대각사가 일본 조선 총독부에 재산몰수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조선박해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조선해방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용성스님은 끝내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에 대각사 에서 열반하시었다. 다비식은 일본경찰의 철저한 방해와 수색 검열 등으로 제자 몇 분만이 스님의 다비식을 조촐하게 치렀으며 스님의 사리탑은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다. 이곳 대각사는 용성조사님 전법과 열반의 땅이며 3.1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대각회 총본산 대각사 주지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