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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농 최규동(崔奎東)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의 기명학교(箕明學校)와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구국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인재양성만이 독립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고 서울의 휘문(徽文), 기호(畿湖), 융희(隆熙), 중앙(中央), 오성(五星)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민족의식의 고취와 독립사상의 배양에 노력하였다. 1918년에는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20년 6월 한규설(韓圭卨)·남궁 훈(南宮薰) 등과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여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으며, 노동독본 등 야학교재의 편찬 간행과 정기강연회를 실시하였다. 1934년 5월에 국학 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이 되어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언어학자 대회에 한국대표로 정인섭(鄭寅燮)을 파견하여 한글과 한국어의 과학성을 알리게 하였다. 1945년 8·15광복 이후에는 1947년에 조선전기공업중학교(朝鮮電氣工業中學校)를 설립했으며, 1949년에 제3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