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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國人 安重根(대한국인 안중근) ⦁국채보상운동 -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 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패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 ⦁교육운동 -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친다. ⦁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 의병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의사는 1908년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 이때 생포한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안의사의 평화사상이 보여진다. 안중근의사는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한인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대한국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의사는 참모 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 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군경과 세차례의 교전 끝에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해령으로 진격하여 5000여명의 일본수비군들을 격퇴 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