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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3회) • 충남 서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99 인 정미면 또한 서산군에 속해 있다가 2012년 당진 시에 편입되었다. 지역 유지, 면장, 면서기가 앞장선 시위 1919년 1월 21일 광무(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 하고 3월 3일 국장이 거행되게 되자 대호지면 도호 의숙(桃湖義塾) 출신 유생들인 남주원(南柱元) · 남계 창(南啓昌) · 남상직(南相直) · 남상락(南相洛) · 남상돈(南 相敦) 등의 의령 남씨들과 이인정 당시 면장의 조카 들인 이대하(李大夏), 이두하(李斗夏)등 7인은 서울로 가서 국장에 참례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3 · 1운동이 발발하는 것을 보았고, 남상락은 그곳에서 구입한 나 무로 된 석유 남포(램프)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를 감추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면장 이인정은 1859년 대호지면 사성리에서 출생하여 만 60세였으며, 1894년 과거에 급제하여 1897년 12월부터 몇 달간 자인군(현 경북 경산) 군수 를 지냈었다. 그후 귀향해서는 대호지와 인천을 왕래 하는 화륜선을 운행했다 한다. 전직 군수로서의 명망 이 그를 대호지 면장이 되게 했을 것이다. 이인정 면 장 밑에 면서기로서 김동운(金東雲)·강태완(姜太玩)· 민재봉(閔載鳳)과 면소사 송재만(宋在萬) 등이 있었는 데, 면장과 이들 면직원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6일 면서기 김동운, 강태완, 민재봉과 소사 송재만은 다른 지역에 부끄럽지 않도록 지역의 명예 를 걸고 독립만세 시위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튿날 오후 4시경, 이들은 다시 면사무소에 모여 구체적인 방법을 궁리했다. 김동운이 아이디어를 냈다. “각 구장에게 도로 수선 취지의 공문을 발하여 4월 4일 오전 8시경 면내 각호에 서 1명씩 면사무소로 모이게 하여 만세를 부르고, 이날이 천의장터 장날이니 군중을 인 솔하여 시장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 애국가와 태극기 제작 4월 2일 저녁, 이들은 면사 무소에서 면장 이인정의 이름 으로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 의 건」이라는 공문 8통을 만 들어 직인을 날인하고, 4월 3 일 민재봉과 송재만이 면소재 지 조금리를 제외한 출포리 임 용규(林龍圭), 송전리 민두훈 (閔斗勳), 도이리 남상현(南相玄), 사성리 박희택(朴熙 鐸), 적서리 차영렬(車英烈), 두산리 김홍록(金烘祿), 장정리 정원우(鄭元愚), 마중리 남상익(南相益) 등 관 대호지 만세시위 때 사용한 남상락 태극기(독립기념관 소장) 대호지 만세시위 주도 자 남상락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겨왔던  남포(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