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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2025년 6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사정을 잘 양해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딩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곧바로 워싱턴군 축회의(태평양회의)를 제안하였고, 이에 대한민국임 시정부에서는 ‘한국대표단’을 임명하였다. 한국대표 단은 1921년 10월 1일 미국대표단에게 청원서를 보 냈고, 10월 중순 하딩 대통령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 냈다. 일본 전권대사 토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가 이승만과 정한경이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의 자 격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대표단은 국내에서 작성 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 書)」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워싱턴회의에 참석한 각 국 대표단에게 배포하였다. 『서재필 박사 자서전』에 는 국내의 374명이 서명한 이 문서를 휴스 국무부장 관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서재필은 오하이오 메리언시까지 간 뒤 하딩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 독립을 요청할 정도로 엄청난 열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은 하딩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배려를 받지 못하였다. 오하이오주 한인 유학생의 ‘미주한인학생단’ 미국내에 한인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유학생들을 대표할 단체의 결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 데 1918년 말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의 이춘호· 안종순·이병두와 인근 콜럼버스의 오하이오주립대 학의 임병직·옥종경·윤영선·김현구 등이 미주한인학 생단(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America) 을 발기하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에 맞춰 한국의 비참 한 사정과 일제의 잔학상을 세상에 널리 알릴 영문 월보(月報)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미주한인학생단은 1919년 3월 『Freedom and Peace』라는 제목으 로 영문 월보 제1권 1호를 발간하고, 『Young Korea』 라는 제목으로 제2호와 제3호를 발행하였다. 제1권 4호부터는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설치한 대한공화 국 통신부의 후원을 받아 『Korea Review』로 이름을 바꾸고 1920년 8월호인 제2권 6호까지 발행하였다. 미주지역의 한인 학생들은 1919년 9월 샌프란시 스코에 한인학생회를 발기하기 위한 대표회를 개최 하고, 1920년 8월에 사무부와 평의부(評議部)·감독 부를 갖춘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헌장 기초안을 마련하였다. 그후 1921년 4월 30일 북미대한인유학 생회의 총회장에 이용직, 부회장에 조병옥을 선출하 면서 그 조직이 완성되었다. 북미대한인유학생회는 1923년 본부를 교통의 중 심이자 한인 학생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미국 중서 부의 중심지인 시카고로 옮겼다. 북미대한인유학생 회의 기관잡지 발행과 유학생계의 장래 사업을 토의 할 목적으로 1923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시카 고에서 제1회 북미대한인유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유학생대회를 통해 북미유학생회는 행정부와 이 사부를 중심으로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대표성을 강 화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The 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로 거듭날 수 있었다. 북미유학생총회는 산하에 지방 한인학생회를 거느 린 가운데 매년 6월 유학생대회를 개최하고, 국문 기 관지 『우라키(The Rocky)』를 발행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애크론지방회 설립 오하이오의 주도는 콜럼버스이지만, 1945년 이 전 산업의 중심지는 애크론·신시내티·클리블랜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