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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광복사 이강년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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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大將 申泰植先生 紀念碑(의병대장 신태식선생 기념비). 1864년 11월 22일(高宗甲子年甲子月甲子日) 경북 문경군 가은면 민지리 (泯池里) 186번지에서 나다. 처음 이름은 철회(哲會)요, 나중에 태식(泰植)이라 일컬었으며, 자는 열경 (悅卿)이며, 호는 도암(鳥庵)이다. 고려 충신 장절공 숭겸공(將節公崇謙公)의 후예로 명하(命夏)공의 맏이다. 1892년 (29살 때) 내부 주사(內部主事)로 행동훈대부(行通訓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의 벼슬을 하다. 1907년 8월 3일 분연히 칼을 잡고 일어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무력 으로 왜적과 싸우기 시작하다. 갈벌 싸움에서 이강년(李康季)의 진과 합세하여 적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섬멸하고 단양(丹陽)으로 넘어가 진세를 정돈하고 부대를 재편성 하여 수백여명 의병이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니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도선봉(部先鋒) 전세영(全世榮), 좌선봉(左先鋒) 강창근(姜昌根), 중군(中軍) 유제칠(柳齊七), 참모(參謨) 엄해윤(嚴海潤), 영솔(領率) 조수안(趙守安), 별포(別砲) 김운선(金雲先) 그 후 선생은 주로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했으며 경기도, 함경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여러 고을에서도 적과 싸웠다. 그 중요한 행적을 선생이 손수 지은 창의가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양(丹陽)에서 영월로 들어가 이강년(李康季)진과 합진한다. 단양 매바우 전투에서 예천, 원주, 충주의 세 방면에서 오는 적을 맞아 10여일, 70여회의 전투를 하여 적에 큰 타격을 주고 부하 7, 8명을 잃다.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에 기습을 당해 곤경에 빠지다. 충주, 옥계에 와서 다시 진영을 재편성 하다. (가을) 울진, 평해로 내려가 신돌석(申乭石) 장군과 만나다. (가을) 제천(堤川)에서 씨워 20명, 포로 13명 사살. 다른 의병대와 합세 양양을 점령 광목 두 수레와 엽전 40만량을 압수하다. 통천(通川)을 거쳐 추자령을 넘고 안변(安辺)에 주둔하여 헌병 5명을 포살하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횡성(横城)에서 부하를 많이 잃고 어깨에 총상을 당하다. 춘천(春川) 근방 산골에서 휴양 치료함. 옛 부하를 찾고 이강년(李康季) 장군을 찾아 함께 화천에서 이틀 전투하여 크게 이기다. 경기도 양주 전투에서 적장 조오사부로(長三郎)의 목을 베다. 북상하여 멀리 평안도 강계(江界)에 가서 스승인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을 만나 거기서 부대를 재편성하여 함께 갔던 의병대장 박화남은 만주로 건너가고 자기부대만 인솔하여 다시 남하하다. 포천(抱川)에 본진을 두고 한양 근방 태릉(泰陵)에서 이틀 잠복하여 적의 수송부대를 기습 적병 70명을 섬멸하고 탄약과 설탕 여러 포대를 노획하여 영평으로 퇴진 백성 들을 위로하다. 영평으로 몰려온 적의 토벌대에 의해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잡히다.그 동안 영평 지방민은 크게 선생의 덕을 칭송하여 송덕비를 세우다. (1908년 겨울) 선생이 떠난 후 왜적들은 본가를 불태웠다. (1907년 9월 1일) 1907년 4월 20일 당시 경성법원(京城法院)에서 사형(死刑)이 언도되었으나 영평 지방 백성들의 진정에 의해 무기(無期)로 감형 10년만에 특사로 출옥하니 때는 1919년 1월 19일이다. 1922년 해외 독립단인 길림성 군정서(吉林省軍政署)의 명으로 이응수(李応洙) 등 70명 동지들과 이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경북도 단장이 되어 활동. 그해 12월 28일 왜경에 잡혀 다시 1년의 옥고를 대구 감옥에서 치름. 1932년 1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못 보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968년 10월 3일 정휘창이 글을 지었음. 앞면은 철기(鐵驟) 이범석 장군이 쓰고 뒷면은 송석희씨가 썼음. 의병 신태식 장군 기념사업회장 서봉 이동영이 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후원 국회 경상북도 보훈청 문경시 문경경찰서 문경교육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