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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관 사적기(興學館 事績記) . 1921년 광주 부호 최명구(崔命龜, 1869~ 1924)는 회갑을 맞아 만여 원의 재산을 들여 흥학관을 건립하고 청년들이 공회당처럼 사용하도록 하였다. 준공식에는 전남지사 등 3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광주 구 시청 사거리 광산동 100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흥학관은 200여 명이 들어가는 강당과 몇 개의 사무실을 갖춘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흥학관에서는 송진우, 안재홍, 방정환 등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고, 각종 사회단체의 집회는 물론 웅변대회와 음악, 연극이 공연되고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야학이 문을 열었다. 광주청년회, 노동공제회광주지회, 천남노동연맹, 광주신간회, 광주청년회 등 청년단체들이 간판을 걸고 독립운동, 사회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들이 전개한 청년운동은 오늘날 광주 정신의 터전이 되었다. 특히 흥학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전국적으로 확대를 논의한 학생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흥학관은 광주보통학교 출신으로 광주3.1운동의 주역이 된 최한영등 신문잡지종람소 회원, 광주 최초의 비밀결사였던 왕재일,장재성등 성진회 회원, 신간회 광주지회장 초흥종, 전남쳥년연맹 집행위원장 장석천, 광주노동공제회 회장 서정희, 계유구락부를 이끈 최원순, 흥학관 최초의 커플이 된 김용환과 최현숙의 주 무대였다. 또한 흥학관은 현덕신, 김필례,김함라, 신경애, 김홍은 등 광주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기도 했다. 흥학관은 일제강점기 말엽 광주부청(시청)에 넘어간 후 광주부 의회 건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매립된 경양방죽 터에 시 청사가 이전되면서 철거되었다. 지금은 흥학관 건물이 사라지고 없지만, 흥학관에서 꿈꾼 청년들의 민족.독립운동의 꿈마저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흥학관의 혼이 서린 이곳에 흥학관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다. 2025년 11월, 흥학관 1921 시민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