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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갑수 김성학 정한식 정윤명 이동술 노전용 노오용 외 백 수십명의 동지 등을 규합하여 고령 청도 창녕 부산 등지에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후 영남의 서남지역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타 비밀단체와 접선을 시도하던 중 조직원의 밀고로 사전에 탐지되여 경남 창녕군 이방면 마수리 산곡에서 대구경찰서장 「후다미」와 고등계 주임 「호사까」가 지휘하는 대구고령량경찰서의 상당 수의 서원에 포위되여 서기 1945년 5월 12일 일경에 체포되였다. 현풍 신사 방화 혐의와 무장봉기 계획 등으로 일경의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 선생은 일제 전시 체로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 1조 국체를 변혁할 것을 계획하고 그 실천 행동이 있은 단체의 수괴에게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법 조항에 적용시켜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왕 유인이 미영소중 등 병합국의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서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이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이 되자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선생은 극적으로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이 공로로 서기 1963년 3월 1일 44회 3.1절에 국가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동년 10월 14일에 국가유공자 기장을 받았다. 선생은 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하여 한민당 민국당 민주당 민정당의 중진간부를 거쳐 신민당 지도위원 및 달성 고령 경산 지구당 위원장 민권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지조있는 정치가로서 조국의 민주발전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또한 선생은 지방사업에도 진력하여 다산면 「닥기」들 제방공사 우곡면 낙동강 제방 공사 야정동 제방공사와 금천교 등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여 이를 실현하였다. 연연 수해에 시달리던 지역을 수한정식하고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를 이룩하는 등 향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항일투쟁과 향토사업 성취에 공이 많은 선생의 큰 덕을 칭송하고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