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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중가주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다뉴바 95 3남 임데이비드, 4남 임피터를 두었다. 다뉴바에서 살던 임성택은 부인의 병치료를 위해 1923년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 전도 사로서 스탁톤에 파송되었고, 1929년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에 전도사로 파견되어 1930년까지 활동하 였다. 1931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 한인감리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채 소와 과일 상점을 경영하면서 생활했다. 임성택은 1968년 12월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96세로 세상 을 떠났다. 다뉴바 지방의 대표적인 한인으로는 ‘이순기’가 있다. 이순기는 1909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원래 민첩한 수 단으로 근일 서인(西人)과 교제함이 일층 더 친밀하 여 서인 예배당에서 가끔 청요하여 연설도 하며, 또 한 가는 곳마다 한국정형을 말함으로 그곳 서인들은 특별히 한인과 동정을 표하였다”라고 한다. 이순기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1909년 고학으로 옥시덴트 중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대한인국민회 의 북미지방총회 총무도 맡았고, 1911년부터는 스 탁톤에서 잡화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17년 다 뉴바로 이주하여 ‘노동 겸 영업 주선소’를 차려 한 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이 순기는 1918년도 다뉴바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 다. 그후 리들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할 당시인 1920년 8월 1일 아들 ‘새미리(Sammy Lee, Samuel Lee)’가 태어났다. 미주 한인역사에서 이민 1세들의 피땀 어린 노고 로, 2세들이 미국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적 다뉴바의 임성택 가족 사진 다뉴바 임성택의 노동주선소 광고 (『신한민보』 1910년 7월 20일자) 이순기 노동주선소 광고(『신한민보』 1918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