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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 성산면 이 터진목에서 서청에 학살됨 (성산리-학살터-터진목, 참조) 10월 2일: 1949년 6월 29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오용필(20, 남)이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됨. 그의 부친 오희삼(52, 남)은 한국전쟁 직후 성산포경찰서로 예비검속된 후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됐다 하나 행방불명됨 현재 정부가 인정한 신풍리의 4·3희생자는 24명(남 17명, 여 7명)이다. 1) 주둔지 - 신풍서당 옛터 가. 소재지 서귀포시 성산읍 풍천로 227 (신풍리 724번지) 나. 개요 신풍서당 옛터에는 경찰파견소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원래 신풍리 향사와 서당으로 쓰이고 있었다. 1936년 일본에 있던 오천 년(吳千年)이 거금을 쾌척해 현재의 리사무소 자리로 향사를 옮겼고, 향사에서 열 었던 신풍서당(훈장 오주언)도 신교육을 위해 개량서당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신풍서당은 해방 이후 정식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지 못해 폐쇄됐다. 신풍주민들은 1948년 하반기부터 민보단에 편입돼 마을경비에 나섰는데 당시 이곳이 민보단 본부로 쓰였다 한다. 주민 강금용(2003년 71세, 남)은 성을 쌓기 전에 무장대가 침입했었다면서, “그때 폭도 들어올 땐 열다섯 이상은 다 근무 섰 지. 나도 습격 들어온 그 옆 초소에 있었어. 그래서 폭도 들어온 걸 본부에 알리고 했지. 그 본부가 지금 리사무소라”고 증언했다. 그 후 마을에 성을 쌓고 나자 이곳에는 경찰이 들어와 경찰파견소로 이용했다. 강씨는 “축성 후엔 이곳에 경찰들이 와서 살면서 세 명씩 교대근무를 했어. 신산 지서에 경찰이 한 스무 명 근무했으니까 세 명씩 각 마을마다 교대로 배치된 거 야. 경헌 다음 민보단과 합세해서 마을을 방위허고 했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