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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년들이 주민들과 함께 마을경비를 서며 마을일에 협조해 이렇다 할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곧 마을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1949년 1월 초순 얼마 전 마 을로 내려왔던 청년들이 성산리 서청특별중대에 끌려갔다 며칠 뒤인 1949년 1 월 9일, 이들 중 강문성(31, 남)을 비롯한 9명이 시흥리·고성리·신양리 주민들과 함께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강씨는, “그 사람들 착실히 경비도 잘하고 그 러했는데 최종적으로 그때, 관덕정이 습격당하는 통에 무혐의로 풀려날 건데 일 부는 성산포에 가서 사살됐습니다. 이건 큰 희생이죠” 1 덧붙였다. (성산리-학살터 -터진목, 참조) 한편 축성은 지서가 있었던 관계로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 그 후 민보단과 특공 대에 편입된 청장년들이 경비를 서고 토벌작전에도 자주 참여했다. 현재 성담 흔 적은 남아 있지 않은데 당시 성문으로 마을 동쪽 일주도로변 난산리 입구 주유소 앞에 동문, 서쪽 희진주유소 앞에 서문이 있었다 한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신산리의 4·3희생자는 13명(남 13명)이다. 1) 학살터 - 만물 가. 소재지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나. 개요 만물은 신산리의 동쪽바닷가 대머들개에 있는 조그만 만(灣)으로 용출수가 있 어 식수나 우마급수장으로 활용됐다. 이 일대에서는 1948년 11월 1일과 2일, 난산리와 삼달리 주민 10여 명이 신산 1) 강봉학의 이 증언과 앞의 증언은 하나의 짝을 이루어 신산마을의 마을유지들에 의한 ‘청년귀순 설 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귀순사건은 귀순했던 청년들 절반 이상이 다시 끌려가 서청에 학살됐 다는 점에서 애초에 한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