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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애월면 법회의 옥사), 문신희(25, 남) 3명이 희생됐다. 이들은 군법회의에서 판결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문중희는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 고 행방불명됐으며, 문철희는 1950년 1월 13일 옥사했다. 문신희는 수감 중 1950년께 부인 강을생에게 보낸 엽서를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됐다. 12월 28일에는 신엄리 자운당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토벌대는 하귀 국민학교로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주민들이 모두 모이자 무장대라며 붙잡아 온 김○○에게 아는 사람을 지목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지목한 주민 20여 명을 트 럭에 태운 뒤 자운당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이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 희생 자는 현재 49명이며, 그 가운데 고성리 희생자는 강애숙(21, 남)을 비롯해 9명이 다. (신엄리–학살터–자운당-2, 참조) 그 후에도 사건은 계속돼 1949년 1월 2일에는 양구생(51, 여) 일가족 4명이 아 들 문장희가 좌익이라며 외도리로 끌려가 학살됐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조을생 (45, 남)이 토벌대에게 연행된 뒤 행방불명됐다. 1949년 봄, 광령2구 자종이가 복구됐다. 고성리 주민들은 광령1구와 하귀1구 광동주민들과 함께 자종이에 함바집을 짓고 임시거처를 마련해 살았다. 그러다 다시 1년 후인 1950년 봄, 마침내 고성리 주민들은 성을 쌓고 고향마을을 복구해 돌아올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고성리 주민들이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 발했다. 곧바로 제주도 전역에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당시 고성리에서는 강재출 (34, 남)과 김도진(21, 남), 양계석(30, 남) 3명이 애월국민학교로 연행됐다가 어 딘가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현재까지 정부가 고성리 4·3희생자로 인정한 사람은 모두 95명(남성 81명, 여 성 1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