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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1948년 10월 30일, 이날 고성리에서는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사 건은 4일 전인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경찰가족 김창언이 무장대에 게 살해됐다. 그러자 이틀 후인 10월 28일, 외도국민학교에 주둔하던 9연대 군인 들이 고성리를 급습해 수색을 벌이고 주민 20명을 외도국민학교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김기순이 남편의 연행에 항의하다 총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 30일 새벽, 고성리 부근에서 이른바 고성리 전투가 벌 어졌다. 9연대 군인들이 고성리 동쪽에서 마을로 진입하다 앞내(현 제2 고성교) 부근에서 무장대와 마주치며 교전이 벌어졌다. 주민들이 증언하듯이 콩 볶듯 총 을 쏘며 전투가 전개됐으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무장대만 대원 두 명이 현장에 서 사망하고 물러났다. 그 직후 토벌대는 외도리로 철수하면서 지나치는 상귀리와 도평리에서 주민들 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리고 연행한 고성리, 상귀리, 도평리 주민들을 외도리 짐 동산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이날 학살된 주민은 모두 48명으로 알려지고 있고, 현 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는 고성리에서 강규호(35, 남)를 비롯한 18명, 도평리 3명, 상귀리 2명 등 23명이다. (외도동–학살터–짐동산, 참조) 당시, 이들과 함께 연행됐던 김창욱(16세, 남)은 총알 한 발이 손바닥을 스쳐지 나가고 다른 한 발이 팔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 곁에 쓰려져 죽은 척 하다가 캄캄해진 후 몰래 빠져나와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피신생활에 들어가 노꼬메오름이나 천아오름까지 올라갔다. 말 그대 로 밤에 잠깐 집에 들렀다 낮에는 숨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주민 학살은 계속됐다. 11월 초순, 단국중학교 학생인 문신호 (17, 남)가 제주경찰서로 연행됐다 풀려났으나 고문후유증으로 12월 7일 사망했 다. 11월 11일에는 변덕흠(54, 남)이 고성리 보로미에서 일을 하다 토벌대에게 사살됐고, 5일 뒤인 16일에는 강위춘(19, 남)과 문위서(20, 남, 교사)가 피신해 있 다가 고성리 왜왓(瓦田)에서 이동하던 토벌대에 발각되어 총살됐다. 그외에 소개 전, 문승학은 밭에서 일하다 토벌대에 학살되기도 했었다. 고성리 주민들은 1948년 11월 19일 명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소개했다. 소개지 에서도 고성리 주민들은 안전하지 못했다. 소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5일 께, 외도지서의 장작사건으로 문중희(25, 남, 군법회의 행불)와 문철희(27, 남,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