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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3 성산면 허용되자 돌아와 마을에 축성을 하고, 경비를 섰다. 그러던 1948년 12월 19일, 이번에는 무장대의 기습으로 보초 서던 민보단원과 가족 16명이 무참히 살해되 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1949년 초, 수산 1구를 성읍을 잇는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 경찰응원부대인 충 남부대 1개 소대(소대장 최융양)가 마을에 들어왔다. 이들은 10개월 정도 마을에 주둔하면서 청년들과 더불어 토벌과 마을경비를 담당했다. 당시 성산주민들을 공 포에 떨게 했던 서청특별중대와는 달리 이들은 주민들과 큰 마찰을 빚지 않았다. 이런 그들에게 주민들은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 수산주민들이 발 간한 『수산리지』 2 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48년 12월에 공비토벌작전에 지장이 되는 중산간 부락민(수산 1, 2리)을 해안마 을로(고성, 신양, 오조, 성산 등) 소개시켰지만 2리의 경우는 군경의 경비도 없이 명령 만 내려졌기 때문에 소개 과정에서 산사람들이 들이닥쳐 산으로 가도록 강요함으로써 선량한 주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부락민의 진정 에 따라 복구령이 내려져 수산 1리만 복구하였다. 이에 민보단을 조직하여 자체경비를 강화하였으며 사태수습 작전에 지장을 주는 마을안의 나무를 벌목하고 부락 주위에 3m의 성곽을 쌓았다. 성 밖으로 1.5m의 외성을 쌓아 그 안에는 가시덩굴을 넣어 월성 을 막았다. 성곽에 2~3개의 성문을 내어 농사일이나 부락간 통행에 사용했다. 마을 사 람들이 외출하려면 민보단장이 발행하는 통행증이 있어야 성 밖 출입을 할 수 있었다. 성 밖에서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은 민보단이 감시 보호했다.” 2009년, ‘돌아온 3인(고순석과 강인삼, 고영배)’ 표석이 옛 마을인 새가름터를 알리는 표석 곁 마을공원에 세워졌다. 이들은 4·3 시기 무장대에 납치됐다 구사 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주민들로 수산주민 한영선(1948, 여)은 이들에 대해, “고영 배는 무장대에 납치돼 물영아리까지 갔다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이다.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증언하기도 했다. 현재 수산리에는 4·3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 당시 밭담이나 산담을 2) 1994년 발간, 46쪽~47쪽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