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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일, 11시경 공회당 길가 초소막에 3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무장대가 습격했 다. 당시는 골목마다 초소막이 설치돼 있었다. 투표하러 갔던 사람들이 혼비백산 해 도망갔으나 우리 친정어머니(강성현, 38)는 만삭인 상태라 향사 울타리담을 넘지 못했다. 무장대는 향사를 불태우고 어머니까지 총으로 쏘아죽였다. 이날 향 사가 불탔기 때문에 투표는 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성산면은 중산간 마을로 수산리를 비롯해 난산리, 삼달리, 신풍리 네 곳이 있었 지만 초토화 작전이 실행되지 않아 마을이 불타지 않은 독특한 지역이다. 1 수산리 에는 1948년 11월 21일께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수산 1구와 2구에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1구(물뫼) 주민들은 집을 비운 채 몸만 해안마을로 소개하면 됐지만, 2 구(고잡)는 온 마을이 불에 타면서 주민들이 황급히 해안마을로 피난해야 하는 곤 경에 처했다. 당시 이런 상황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젊은이들이었다. 젊 은 층은 오갈 데가 없었다. 해안마을로 내려가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 선뜻 내려갈 수도 없었는데 이런 다수의 청년들은 점차 인근 야산으로 숨어들었고 나 중 토벌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 후 수산 2구 고잡마을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했다 열흘쯤 후인 12월 1일 께 수산 1구로 복귀해 1구 주민들과 집단생활을 꾸려나갔다. 당시를 어떻게 살았 는지 말로 다 못 하겠다며 혀를 차는 오무춘(1938년생, 여)이, “전복껍데기를 솜 으로 막아서 멜젓을 지지는데 9번을 지져야 13명의 아침 식사가 끝이 났다. 송당 가서 무도 사왔다. 포래밥, 물웃밥, 톳밥을 먹었다. 물웃밥은 보리그루를 섞어야 먹을 수 있었다. 지금도 만드는 법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하고 증언했다. 1948년 11월 21일 소개 전후, 주민학살사건도 여럿 발생했다. 집이 불타 우왕 좌왕하던 2구 주민들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집을 비운 1구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 이란 명분으로 토벌대에 잡혀가 학살됐다. 특히 1948년 11월 17일 성산리 터진 목에서는 60대의 김경학 부부와 며느리, 두 살 난 손자 등 일가족을 비롯한 13명 이 한꺼번에 총살되기도 했는데 12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주민들이 연이어 잡혀가 터진목에서 총살됐다. (성산리-학살터-터진목, 참조) 수산 1구 주민들은 일시 고성리 등지의 해안마을로 피난갔다 열흘 만에 복구가 1) 수산리 2구 고잡마을만은 유일하게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마을집들이 모두 불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