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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아주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 내가 직접 지은 거다. 법정 이름 은 고성 2리, 행정이름은 신양리이다.” 신양리에는 4·3 시기 좌익활동가가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어업 조합 서기로 근무했던 한순화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무릉학교 교감이었던 오관형 (30, 남)이었다. 1948년 하반기,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오관형은 산으로 피했다 나중에 잡혀왔고, 한순화는 일찍 일본으로 도피했다. 신양주민들만 동원돼 쌓은 마을의 4·3성은 수산봉과 원생곶으로 가는 길에 있 었는데 고성 1구와 경계지역에 있는 밭담을 허물어서 쌓았다. 마을 전체가 모래 밭이라 성 밖에 한 발 정도 깊이(약 2m)의 호를 파면서도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 다. 성문은 온평리 가는 길에 서정문, 성산포 가는 길에 동정문, 고성리 가는 길에 북정문이 있었다. 신양리는 한라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수산봉 방향으로 무장대 습격을 종종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에 무장대는 성을 쉬 넘나들지 못했다. 보 초를 선 기간은 3~4년이 되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현재 마을에 남아 있는 성 담은 없다. 김봉익이 작성한 수기, 『濟州道 四·三事件』에 신양리의 희생자가 언급돼 있다. “신양리 ‘처형자’는 오관형, 한신화 등 4명, ‘폭도에 의한 피살자’ 김만풍 구장 등 3명, 나머지 희생자는 한신화의 처자, 오관행의 처 등 19명이다.” 한편 오태옥이 성담 보초를 서다 무장대가 습격하자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손에 수류탄을 든 채 총맞아 죽는 사건도 있었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신양리 4·3희생자는 모두 30명(남자 23명, 여자 7명)이다. 1) 역사현장 ① 구 향사 옛터 가. 소재지 서귀포시 성산읍 섭지코지로 26번길 19 (고성리 539-5번지)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