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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을 한다며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살해함 11월 13일: 부원병(23, 남)은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했다가 이날 토벌대에 끌려가 총살됨 광령리에서 가장 인명피해가 큰 사건은 1948년 11월 16일 새벽에 일어났다. 전날 밤 11시께부터 중엄파견소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유수암리의 동카름인 범미왓을 시작으로 유신동(광령2구 마을 중 가장 산쪽에 위치한 마을임)을 기습 해 집집마다 불지르고 놀라 깨어나 도망가는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을 난사했다. 그런 후 이들은 광령1구로 진출해 향사 주변 한길가를 따라가며 주변의 가옥에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중엄파견소가 며칠 전인 11월 11일 무장 대의 습격을 받자 그 보복으로 광령리를 주목해 행해진 것이라고 주민들은 인식 하고 있다. 피해는 유신동이 가장 컸다. 이날 광령1구와 2구에서 각각 3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됐다. 현재까지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된 광령리 주민은 고계문 (56, 여)을 비롯해 33명이다. 이 외에도 이날, 이봉화(25, 남)는 토벌대가 마을을 급습하자 산으로 피신한 뒤 행방불명됐고, 김철중(37, 남)은 제주읍 도립병원에 입원해 있다 토벌대가 광령 리를 급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오던 길에 무장대에 납치된 뒤 행방불명 되기도 했다. 광령 주민들은 이 사건 후 3일 내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연고지를 따라 해 안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나 일부 청년들과 학살극에 놀란 노인들은 소개하지 않 았다. 이들은 그 후 거의 모두 토벌대에 잡혀 총살됐다. 소개한 주민들의 삶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서가 소재했던 외도와 하귀에서 특히 심한 탄압을 받았다. 토벌대는 온갖 트집을 잡아 주민들을 동원하고 학살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다 음과 같다. 1948년 12월 9일: 김철구(22, 남)와 양태연(25, 남)이 외도리 짐동산 부근에서 총 살됨 (외도리–학살터–짐동산, 참조) 12월 10일: 양기선(64, 남) 부자 등 3명이 하귀리 비학동산에서 총살됨 (하 귀리–학살터–개수동 비학동산 팽나무 및 그 앞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