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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단과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피선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전한 다음 1921년 소만접경 밀산현에서 각처 독립군이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창립할새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어 독립군을 총지휘하였다. 노령에서 자유시 참변등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1925년 3월 10일 영안현 영고탑에서 김좌진, 허성묵등과 함께 독립운동자의 대동단결체인 신민부 창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오백명의 사관생을 양성하였다. 거대한 독립운동기관의 세력이 일가월증하니 급기야 1927년 2월(음 1월 25일) 석두하자에서 신민부총회중 교활한 일본령 관원의 습격을 받아 최고책임자인 선생과 유정근 등 10명의 간부가 체포당했다. 1928년 6월 13일 10년형 언도를 받고 평양과 서대문에서 9년동안에 걸친 가혹한 옥고로 득병 가출옥하였으나 1936년 8월 25일 한을 품고 병서하시니 옥중순국과 다름이 없다.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