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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주도로 남동쪽으로 넓게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고성리는 당시 해안마을 성산리 와 중산간 마을 수산리의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어 1948년 11월에도 소개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중 10여 가호의 주민이 거주했던 줴영밧만 집을 모두 헐고 소개한 후 복구되지 않아 현재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고성리의 주요 사건으로는 동남국민학교 교사가 학교 등사판을 분실했다는 이 유로 1949년 1월 9일, 서청에 연행됐다 터진목에서 총살된 사건과 그 며칠 후인 1월 13일, 서청특별중대에 끌려간 마을 청년 대부분이 성산포로 끌려간 후 28명 이 한꺼번에 터진목에서 총살된 사건이 있다. 다음은 고성리의 주요 주민학살사건이다. 1949년 1월 9일: 동남국민학교(당시 성산서국민학교, 현재 동남초등학교) 등사 판 분실사건으로 교장 김영택(32, 남)과 교사 정맹존(22, 남), 홍창수(21, 남), 그리고 성산국민학교(당시 성산동국민학교, 현 재 성산초등학교) 교사로 김두옥(18, 남)과 정양심(19, 남) 5명 이 터진목에서 총살됨 (성산리-학살터-터진목, 참조) 1월 13일: 고원평(19, 남)을 비롯한 고성리 청년 27명이 서청특별중대에 연행된 후 터진목에서 학살됨. 이날 고성리 외에 신양리에서 1 명, 난산리에서 5명이 함께 총살돼 희생자는 모두 33명에 이름 (성산리-학살터-터진목, 참조) 고성리의 4·3성은 1948년 12월께 주민들이 동원돼 쌓았다. 이때는 대다수의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로 고성리는 줴영밧을 제외하고 마을 전체를 아울러 성을 쌓았다. 당시 성 밖에 위치하게 된 줴영밧 주민들은 성 안으로 들어 와 피난생활을 했다. 현재 고성리에는 4·3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고성리의 4·3희생자는 모두 49명(남 44명, 여자 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