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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7월 2일: 홍의정(60, 여)은 밭에서 일하다 지나가던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며칠 후 사망함 9월 27일: 단국중학교 학생 양창범(16, 남)은 숙부 제사집으로 찾아온 토 벌대에 연행된 뒤 행방불명됨 10월 2일: 양창희(21, 남)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일시 귀향 중 피신한 다며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됨 토벌대는 11월 3일 오전 10시께 수산리를 급습해 가택수색을 벌였다. 그리고 주민 12명을 신엄지서로 끌고 갔다. 당시 젊은이들은 모두 피신한 뒤여서 연행된 주민은 모두 중장년층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인 11월 11일 새벽, 무장대가 신엄 리를 습격했다. 토벌대는 그날부터 12일까지 이틀 동안 6개 마을, 37명의 주민들 을 신엄지서 앞 방두리왓에서 학살했다. 그때, 11월 3일 강제연행돼 신엄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수산리 주민들 중 강근호(43, 남)를 비롯한 11명도 함께 학살됐다. (신엄리–학살터–방두리왓, 참조) 이날 학살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송창도는 함께 연행됐으나 구엄 리 대동청년단원으로 있던 동서가 학살장소로 끌려갈 때 지서 문 앞에서 그를 몰 래 빼주어 살아날 수 있었다. 강희도의 집안은 풍비박산됐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학살되는 것을 본 서른두 살의 아들이 입산해 무장대로 활동한다. 이런 사실을 알 게 된 토벌대는 1949년 1월 16일에는 누나(41)를, 2월 16일에는 어머니(66)를 아들을 대신해 학살한다. 모슬포 지역 사례에서 보이는 소위 ‘대살’이다. 그리고 9 연대 군인이었던 동생(21) 역시 1949년 5월 5일, 오라리 지경에서 총살했다. 서 른둘 아들은 1949년 봄 토벌대에 체포된 뒤 그 해 7월 2일 군법회의에서 판결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1950년 12월 28일,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 후에도 수산리에서는 한 사람, 두 사람 토벌대에 희생됐다. 학살에는 이유도 없었다. 밭에서 일하다, 숨어다니다 검거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예비검속에도 수산리 주민 2명이 희생됐다. 그중 이 춘식(27, 남)은 전라도 출신으로 수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948년 10월 께 신엄지서로 연행됐다 풀려났었고, 예비검속 즈음에는 애월지서 수산출장소 용 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문규(34, 남)는 1949년 5월께 한 차례 제주읍 농업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