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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제를 ‘현지조달’로 해결했다.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며 주민들과 갈 등을 빚었다. 정부는 이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다. 정부는 서청대원을 증강해 서청특별중대를 편성하고 한림, 월정, 성산포 지역에 파 견하기도 했다. 서청특별중대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이들은 제주사 람들의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악마 같은 존재였고 성산면 희생자의 70%(전체 471명 중)가 이들에게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학살되기도 했다. 4 당시 이곳 성산동국민학교에 서청 병력이 언제부터, 얼마나 주둔했는가 하는 사 실은 자료가 부족해 잘 알 수 없다. 증언자에 따라 다른데 약 100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원래 구좌면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가 이곳으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산동 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며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 하는 곳으로는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저창고를 이용했다. 학교 담을 허물고 출입을 용이하게 하여 일제 때부터 있었던 창고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른다. 매일,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 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봤었기 때문이다. 시흥리 강인옥의 증언이다. “누런 군복을 입었으나 지휘관을 빼고는 계급장도 없었어. 국 민학교에 주둔하면서 한재옥의 창고를 주민 수감처로 사용했지. 그 창고는 절간 고구마를 저장하던 창고였는데 술공장이었어.” 4) 양봉철, 「제주4·3과 서북대대」, 『4·3과 역사』 통권8호, 2008, 58~59쪽. “제9연대장 송요찬은 민간인 신분의 서청단원들로 이른바 ‘특별중대’를 만들어 토벌작전에 활용하 였다. 노윤복은 계몽연극단원으로 제주에 왔다가 서청 특별중대원이 되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 특별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으며 대원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도 계급장도 없었 다. 이들은 당연히 군번이 없었고 군적에도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이었다. 송요찬은 제9연대 장교와 헌병들에게 이들의 활동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특별중대는 한림, 구좌면 월정 리,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다. 제9연대가 철수하고 제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제2연대 제11중대 소속이 됐다고 했다. 부대 교체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현지에 잔류하고 있다가 제2연대 제3대대(후술하는 ‘서북 대대’)에 배속된 것이다. ‘서청 특별중대’는 주로 소대 단위로 이동하면서 토벌활동을 벌였다. 현역 장교가 아닌 서청단원이 대부분 중대장·소대장을 했는데 중문에서 한림으로 이동·주둔한 특별중대와 구좌면과 성산포에서 활동한 특별중대가 동일 부대인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특별중대가 하나인지 아니면 2개 이상이 존재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