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page
87 제주읍 경찰발포에 의한 첫 인명살상이 벌어져 4·3이 촉발됐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왕성한 활동을 할 즈음인 1945년 9월, 제주도에서도 건준청년동맹이 결성되어 그 간판을 관덕정 기둥에 내걸었다. 당시에는 관덕정을 사방에서 막고 사무실로 이용했다. 미군정이 들어 서자 건준청년동맹은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북제주군청이 들 어섰다. 1949년 1월 지금의 목관아 자리에 있던 제주도청 청사가 화재로 전소되 자 제주도는 관덕정을 임시 청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제주북국민학교 행사장을 동서로 나뉘어 빠져나갔다. 서쪽 행렬은 운동장을 나와 관덕정으로 향했다. 이들 행렬이 관덕정 마당을 모두 빠져나갈 즈음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어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기마경찰은 어린아이가 치인 사실을 몰랐 던지 그대로 지나가려했다. 곧 주변에 있던 일부 군중들이 “저놈 잡아라!” 소리치 며 돌멩이를 던지고 쫓아갔다. 당황한 경찰은 경찰서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 순 간 총성이 울리고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오후 2시 45분 즈음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전도민들이 들고 일어서 발포책임자 처벌을 요구 관덕정의 1949년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