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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서 학살집행이 있었어요. 그때 몇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4~5명은 동쪽 밭에서 죽 었죠. 내가 아는 사람도 3명이 있었어요. 문봉택 형제하고, 상귀 사람이에요. 문 봉택은 나에게 한 구덩이에 전부 담아버리면 나중에 시체를 못 찾을 수 있으니까 자기만 따로 죽여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어요. 내가 군인에게 얘기를 하자 문봉 택만 밭담 쪽으로 데려가 죽이더라고요. 희생자들은 하귀지서에 수감됐던 사람들 로 알고 있어요”라고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특공대장으로 있었는데 군인들이 시 체를 처리해달라고 해서 현장에 갔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 자운당에서 학살된 하귀 주민들은 1948년 12월 20일께 토벌대에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다. 토벌대는 이날 하귀1구를 포위하고 들어와 주민들 을 공회당 자리(현 하귀1리 마을회관 터)에 집결시켰다. 소개민들도 많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경찰이 호명을 했다. 호명된 사람들은 곧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 제주읍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간에 하귀2구에서는 토벌대가 주민들과 고성, 상귀 등지의 소개민들을 하귀국민학교에 집결시켜 ‘눈 감으라’고 명령했다. 토벌대는 산에서 붙잡아 온 아무개를 시켜 ‘네가 아는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다. 이렇게 무 차별 손가락질 당한 사람들은 차에 태워져 제주읍내로 보내졌다. 자운당 학살은 이렇게 제주읍내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약 1주일 후에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것 이다. 12월 28일 학살에 대해 강태중(하귀리, 2003년 72세)이 “제주읍내에서 자운당 으로 향하던 차가 하귀리를 지날 무렵, 조군하라는 분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 해 웃옷을 벗어 던졌어요.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지요” 2 하고 당시를 기억했다. 시신 수습은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다음 해 5월 초, 토벌대의 허락을 받은 후 이 루어졌다. 구덩이에 살짝 흙이 덮인 시신은 이미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유족들은 대강 옷가지 등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된 시신은 총 72구였다. 한편 이날 아버지(고두옥, 39)가 희생돼 시신수습 현장에 갔었던 고택주(2003 년 74세, 남)는 사건 현장에 대해 김여만과 다른 증언을 했다. 고씨는 “사건 현장 2)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하귀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