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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8번지)로 이전됐다. 다음해 1935년에는 면의 명칭이 면소재지의 이름을 따르게 되면서 정의면은 전라남도 제주군 성산면으로 개칭됐다. 그 후 1961년, 성산면사 무소는 성산리에서 다시 고성리(고성리 1023-2번지)로 이전하게 됐고, 1980년 에는 성산면이 성산읍으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산리 일출봉 해안에는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조성한 해안 동굴 18기가 남아 있다. 이것은 일본해군이 만든 특공기지로 전남지방 광산 노동 자들이 강제 동원돼 만들어졌다. 이 동굴진지는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집 어넣어 폭파시킨 다음 곡괭이로 다듬는 식으로 구축됐다. 성산일출봉 해안가의 경사진 층리를 따라 만들어졌는데 모두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일제는 당시 제 주도 해안가를 따라 성산일출봉과 삼매봉, 송악산, 수월봉, 서모봉의 다섯 개 지 역에 이러한 자살특공기지를 설치했다. 4·3 시기, 성산리에는 초기 무장대의 지서 습격이 한 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무 장대로 인한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서청특별중대가 성산국민학교(당시 성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되면서 성산면과 구좌면 주민들에게는 악몽의 세월 이 시작됐다. 서청은 툭하면 주민들을 끌고가 매타작을 시작으로 온갖 고문을 자 행했고, 그러고 나면 터진목 일대나 우뭇개동산에서 학살했다. 자기도 무슨 혐의를 뒤집어 써 특별중대 주둔지에 몇 번 끌려갔었다는 이기선 (2003년 77세, 남)은, “거기서 취조는, 그 뭐,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좌우간 무 조건 잡아놓으면 두드려 패는 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말을 시작 하자마자 치를 떨었다. 당시 성산주민들은 이렇듯 자신이 직접 끌려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인근 마을 주민들이 날마다 잡혀와 고문 받는 비명소리와 학살당하는 총 소리를 악몽처럼 들으며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아래 학살터-터진목, 참조) 성산주민들은 4·3성을 마을 입구인 터진목 부근에만 100m 정도 쌓았다. 성에는 정문도 만들어져 출입이 통제됐고, 주민들은 성담 초소에서 번갈아 보초를 섰다. 현재 정부가 인정한 성산리의 4·3희생자는 모두 21명(남자19명, 여자 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