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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 애월면 김여만은 윗동네에 살고 있어 무장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기습 다음날인 11월 12일, 신엄지서 부근은 학살터로 변했다. 지서 피습 이전 에 잡혀와 갇혀있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끌려나와 지서 앞밭인 방두리왓에서 총살됐다. 이때 신엄리 주민이었던 김금아(37, 남, 이명 김용원)도 희생된다. 일본 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엄3구 구장을 맡고 있던 김금아는 전날 새벽 군인들에 잡혀 신엄지서로 연행됐었다. 그는 이날 지서에 갇혀있던 다른 중산간 마을 주민 들과 함께 총살됐다. 그런데 이날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하달제(52, 남)는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어 있다 다시 붙잡혀 외도리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아내인 송기종(49, 여)과 두 자 녀, 그리고 김두호(22, 남)를 비롯한 주민 3명도 같이 끌려가 12월 17일 외도리 도그내에서 학살됐다. (외도동–학살터–도그내, 참조) 신엄리가 다시 무장대에 기습을 받은 것은 1948년 12월 19일이었다. 이날 무 장대는 구엄리를 습격해 구엄국민학교를 비롯한 가옥 30여 채를 불태우고, 26명 을 학살한 뒤 신엄리로 이동해왔다. 신엄리에서는 보초를 서던 김두칠(26, 남) 등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후 1949년 1월 9일 무장대 습격 때에는 보초를 서 던 주민들 대부분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으나 강태화(30, 남, 이명 강태우)는 붙잡 혀 살해됐다. 한편, 중산간 마을이었던 신엄3구(용흥리)는 상동만 소개되어 하동으로 이주했 다. 당시 애월면 중산간 마을 중 소개하지 않은 마을은 봉성1구, 상가, 수산, 용흥 하동뿐이었는데 수산과 용흥 하동이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신엄리와 구엄리를 무 장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현재까지 신엄리 주민 중 정부로부터 4·3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47명(남성 39명, 여성 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