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page

837 성산면 “1948년 12월 29일 성산면 오조리에 갑자기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해변마을인 오조 리에서, 사이렌 소리는 곧 토벌대의 집합 명령이었다. 주민들은 늘 하던대로 서둘러 공 회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전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9연대와 교체한 2연대 군 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낯이 익은 서북청년단원도 있었다. 사설단체원인 서청이 2연대 군인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우선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줄 아는 20명 가량 의 주민을 골라냈다. 또 집집마다 뒤져 집결하지 않은 사람을 데려와 함께 군 주둔지인 성산포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성산리의 한 창고에 가둬 모진 고문을 하다가 나 흘 만인 1949년 1월 2일 일출봉 아래 속칭 ‘우뭇개’에서 학살했다. (중략) 오조리에 가장 큰 인명 희생을 몰고 온 이 사건이 다이너마이트에서 비롯됐다 하여 주민들은 이를 ‘다 이너마이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혹은 당시의 표현대로 ‘던지기약 사건’이라고도 한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이며, 이것이 왜 학살극의 빌미가 됐는가. 당시 주민들은 일본 군이 패전해 돌아가면서 남긴 폭약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이용했다. 일부 지역 에서는 고기잡이하던 중 잘못 폭발하는 바람에 1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어장을 황폐화한다 하여 경찰 과 어업조합이 합동단속반을 편성해 적발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4·3 전부터 다이너 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이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또 9연대 시절에는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경비용으로 사용토록 했다. 그렇다면 왜 새삼스레 이것 이 문제가 됐는가. 주민 오종훈 씨는, ‘불법이긴 했지만 당시엔 고기잡이에 다이너마이 트를 이용했습니다. 또 4·3이 발발한 후에는 민보단이 보초를 서는데 사용하라고 해서 초소마다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군인들이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던 한 사 람을 끌고 와 주민들을 집합시킨 후 다이너마이트 관리자를 끌고 갔습니다. 타 지역 출 신으로 마을에서 멍석이나 짜며 지내던 불쌍한 노인은 제때 집합하지 않았다고 함께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9연대와 2연대가 교체될 때 이에 대한 인수 인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겁니다.’ 증언했다.” 현금란도 이 사건에 대해, “사촌 오빠(현세홍)가 폭도한테 잡혀갔다가 살아와서 토벌도 다니고 했는데 결국 서청한테 끌려가서 우뭇개에서 총살당했어요. 현장에 서 유일하게 송칩 할머니는 총 맞고도 성산일출봉 절로 기어가서 극적으로 살아 나기도 했죠. 오조리 하르방이 다이나마이트 기술자였는데 그걸 만들어 토벌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