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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서청특별중대가 성산국민학교(당시 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주민 학살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2일, 이웃 마을 오조리에서 발생한 다이너마이 트 사건으로 19명의 주민이 학살되면서 그 여파가 시흥리에까지 번졌던 것이다. 해방 후 시흥리는 지금의 시흥마을회관 자리에 있던 향사를 중심으로 마을이 운영됐다. 당시 향사는 학교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상동 주민들은 이곳이 사람 들을 잡아다 구타하는 장소였다는 다른 기억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1948년 11 월 이후 제주도 전역에서 초토화작전이 실시되고 시흥마을에 성이 축조되며 시흥 리 경찰파견소가 향사 앞 민가에 설치돼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향사와 파견 소가 마당을 같이 써 같은 장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순화(1935 년생, 여)는 당시 파견소에 서청도 있으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했다. 구장이 었던 강원규는 매를 맞는데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다른 경찰이 말릴 정도였다 고 하며, 강월천(1925년생, 여)도 남편을 찾아내라며 이곳으로 끌려가 무수히 구 타를 당했다고 아프게 기억했다. 다음은 시흥리의 주요 주민학살사건이다. 1949년 1월 2일: 오조리 다이너마이트사건과 관련해 부갑생(45, 남)과 부성순 (20, 남)이 성산포 터진목에서 서청토벌대에 학살됨 (성산리- 학살터-터진목, 참조) 1월 9일: 강창수(29, 남)가 오조리의 다이너마이트사건과 관련해 서청토 벌대에 끌려가 고문받다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됨 (아래 4·3 성-시흥리 상동 4·3성, 참조) 2월 1일: 서청이 함덕 대대본부에서 석방한 성산주민 46명을 재연행해 이날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함. 그중 시흥리 출신자는 강태삼 (20, 남)과 강태흥(22, 남) 2명임 시흥주민들은 1948년 겨울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담 쌓기에는 시흥리 전 주민이 동원돼 상·하동을 전부 둘렀고, 성문은 일주도로문과 하동남문, 상동문, 망모루동산문의 4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