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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제주4·3유적 Ⅰ_ 제주시편 보복은 곧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군인들은 하귀1 구에서는 하귀리 공회당에 2구에서는 하귀국민학 교로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하귀국민학교에는 하 귀리 주민과 소개민 등 800여 명이 집결했다. 주 민들이 모이자 경찰이 무장대로 활동하던 주민 한 명을 끌고 나와 아는 사람을 지목하라고 협박했 다. 그는 수십 명을 지목했다. 이날 몇 명이 지목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귀1구에서는 27 명 내외, 하귀2구에서는 50여 명 정도였다 한다. 이렇게 지목된 주민들은 그 후 제주경찰서로 끌려 가 취조를 받고 농업학교에 갇혔다. 그리고 12월 28일, 토벌대는 농업학교에 잡혀있던 주민들을 신엄리 자운당으로 데리고 나가 학살했다. 이 사 건의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는 49명이다. (신엄리–학살터–자운당-2, 참조) 2012년 교문 동쪽에 ‘故 이재창 선생 공덕비’가 세워졌다. 다음은 그 비문이다. 이재창 선생 공덕비 故 이재창 선생 공덕비 선생께서는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17대 손이며 제주 입도조 승문공의 13대손 이고 광령파 순남공의 10대손이다. 1920년 6월 2일 애월읍 하귀리에서 출생하 여 마을에서 장성하고 축구에도 남다른 능력을 배양하여 제주도 축구 발전의 혁 혁한 공로를 세웠다. 1947년 7월 1일 전라도에서 제주도로 행정구역이 바뀌기전 전라도 대표선수 로 활약했던 선생은 1947년 11월 광복 후 처음으로 열린 제주도 전도축구 대회 에 하귀를 중심으로 인근지역 청년으로 구성된 월성축구단 선수로 제주경찰 감찰 청 축구단과 시합을 겨루게 되었다. 이 시합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선생은 우승 을 목전에 두고 관권개입 때문에 더 이상 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후 제주 4·3 당시 29세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3녀인 이순자 씨는 하귀초등학교 18회 졸업을 시작으로 의과대학을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