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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지역
진해는 배움의 터전인 학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시도 되었는데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독립의 열의를 굳건히 지켰다.
1919년 4월 2일 대정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주동자가 체포되면서 무산되었다.
웅동과 웅천에서는 4월 3일 함께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웅동 주민들은 나발등 고개를 넘어와 웅천 주민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만세운동 당일 계광학교 교사인 주기용과 웅천 웅동 주민들 3천여 명이 웅천읍성 동문과 우시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연합 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헌병과 거류 일본인들은 총칼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32명을 체포하였다.
진해의 독립만세운동은 학교와 개신교회 및 지역민 들이 힘을 모아 독립 의지를 드높인 저항의 상징이자. 배움의 터전이 곧 독립운동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