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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애월면 549-4번지) 나. 개요 해방 직후 제주도에는 자주교육 열풍이 몰아쳤다. 각 읍면마다 국민학교가 세 워지고 중학원이 설립됐다. 중학원은 정규 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지 못한 단계에 서 임시로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학교다. 하귀중학원은 1945년 10월 15 일 학원동 출신 고창옥을 원장으로 6학년까지 수용하는 고등교육기관을 목표로 설립됐다. 설립 당시 1학년 1개 학급에 학생 50명을 모집하여 개원했다. 교실은 1구 공회당(하귀1리 549-1번지)을 사용했고, 학생들은 다음 해 8월 5일자로 1학 년 수료증을 받았다. 해가 바뀌고 학생이 늘어나자 자연 교실이 모자랐고 2학년 은 미수동 공회당(현 귀일교회, 하귀2리 1715-1번지)에서 수업을 받았다. 8~9명 의 교사들이 국어, 공민, 수학, 역사, 동식물, 위생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강의는 지금의 대학 강의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학생들은 얘기한다. 하귀중학원생들은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관덕정에서 벌어진 발포사건으로 제주도 전역에 도 민총파업이 벌어지고 미군정이 파업을 탄압하면서 제주도의 다른 지역, 다른 단 체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그 후 미군정의 검거를 피해 숨어다녀야 했다. 1947 년 8월 경찰은 돌연 하귀중학원생 5명을 체포했다. 당시 이 사건 내용은 『제주신 보』 2 에 실려 있다. “제1구 경찰서에서는 지난 27일 새벽 돌연히 애월면 하귀리 미수동에서 동리 중학 생을 비롯한 국민학교 아동에까지 이르는 일대 검거를 단행하였는데 경찰 당국의 발표 에 의하면 무허가 집회, 무허가 삐라에 관한 증거서류가 발각된 것이 원인으로써 피검 자 10여 명은 남로당 세포조직의 혐의자들이라 한다.” 위 기사를 보면 학생들의 검거 이유는 남로당 가입이었다. 그러나 당시 하귀중 학원생으로 채포됐던 강태중(2003년 73세, 남)은 3일 동안 구금됐다 석방됐는데 2) 『제주신보』, 1947.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