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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하귀 주민들의 희생은 한국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하귀리에서는 예비검속으로 강상배(19, 남, 이명 강선훈), 강재철(35, 남), 진옥순(32, 여) 부부, 김용운(21, 남, 이명 김용철), 박지석(29,남), 양기순(21, 남), 조재두(23, 남) 등 7명이 학살됐다. 한편, 하귀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많은 인명피해와 관련해 회자되는 이 야기 한 토막이 있다. 소위 경찰과의 갈등이 시작된 월성축구단 사건이다. 월성축구단(단장: 고석찬, 양조장 경영)은 일제강점기 호남대표였던 이재창을 주장으로 하귀 출신들 외에 외도의 이재순, 도두의 김태연을 영입해 해방 직후 구 성됐다. 이들은 주로 하귀1리 공회당에서 연습했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말 제 주비행장에서 전도축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용진회, 구좌, 서귀포, 용담팀 등 40여 개 팀이 출전했다. 제주경찰감찰청은 A팀, B팀 두개 팀이 출전했다. 그 중 B팀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대회 첫날 우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월성축 구단과 감찰청 B팀이 첫 경기를 벌이게 되었다. 두팀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다 전반 2~3분을 남기고 월성축구단이 먼저 한 골을 넣었다. 심판이 휘슬을 불어 골 인을 인정했다. 그러나 감찰청 간부들이 항의했고 심판은 무효를 선언하고 말았 다. 그러자 월성축구단 주장인 이재창이 회의를 연 후 후반전을 포기하고 기권해 버렸다. 하귀 주민들은 이런 월성축구단의 행동에 경찰이 하귀에 대해 반감을 갖 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2003년 5월, 하귀리는 영모원(英慕園)을 조성해 이곳에 항일운동가는 물론 4·3 희생자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한 자리에 모셨다. 3년여 의 준비 기간을 거쳐 조성된 이곳은 4·3 시기 피해자인 주민과 토벌대인 군경 희 생자를 함께 모셔 그간 4·3진상규명운동의 모토였던 ‘화해와 상생’의 본보기를 보 여주었다. 이 사업은 하귀리 주민들 스스로 의견을 수렴하고, 비용을 모금해 이루 어져 그 의미가 더 크며, 그 후 이곳과 유사한 추모공원이 제주도 여러 곳에 조성 되는 효시가 됐다. 현재까지 하귀리 4·3희생자로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266명(남성 229명, 여성 3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