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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런 와중에 하귀중학원생 여럿이 1947년 여름 제주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47년 말이 되어가자 청년들은 계속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마을에 있을 수 없게 됐다. 이들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안 됐다. 산으로 가거나, 타 지방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일본으로 밀항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4·3이 발발하고 5·10단선이 제주읍·북제주군 지역에서 무효화된 이후, 경찰이나 군인들의 하귀리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숨어버린 청년들 을 찾기 위한 노력동원, 자수공작 등이 벌어지면서 하귀 주민은 물론 11월 중순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하귀로 내려온 많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희생됐다. 4·3 무장봉기가 발발한 이후 하귀리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두 명씩 희생된 사건은 그 횟수가 너무 많아 주요 사건만 정리한다. 1948년 5월 25일: 문수택(31, 남)과 임석붕(49, 남), 현을호(50대, 남) 3명이 가문 동 원벵듸에서 총살됨. 이날 중엄파견소 경찰과 대동청년단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돈지동산에 집합시킨 뒤 서로 뺨때 리기를 시키거나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다 희생자들을 끌고 가 총살함 5월 26일: 양사봉(68, 남) 등 3명이 가축을 살피러 나갔다가 토벌대에 붙 잡혀 개수동 진수리에서 총살됨. 이날 대청단원들은 불온문서를 찾는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을 하며 개인재산을 약탈하기도 함 11월 11일: 구엄리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직후 신엄지서 경찰이 하귀리 를 급습해 개인재산을 약탈하고, 강인홍(68, 남) 등 4명을 마을 에서 총살함. 고영기(27, 남)와 양군신(29, 남)은 신엄지서로 연 행한 뒤 신엄리 방두리왓에서 총살함 (신엄리–학살터–방두리 왓, 참조) 12월 10일: 토벌대는 개수동 비학동산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임산부였 던 김모(31, 여, 고정규 처) 여인을 주민들 앞에서 무참하게 학 살하고, 하귀 주민 외에 광령과 장전에서 소개온 사람들을 무장 대나 도피자 가족이라며 총살함. 이날 강기유(49, 남), 강두중 (미상, 남) 등 23명이 학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