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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 애월면 2. 하귀리 하귀리는 4·3 시기 1구와 2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귀1구는 속칭 군냉이라 불 렸고 마을구조도 단순했다. 그러나 2구는 미수동, 가문동, 개수동(후에 학원동으 로 바뀜), 답동, 번대동의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된 큰 마을이었다. 하귀리는 일주 도로변에 대다수 마을이 위치했으나 개수동은 약간 산쪽으로, 가문동은 해안가에 위치했다. 당시 일주도로변 마을은 중산간 마을보다 일반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하귀리는 예외적으로 중산간 마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산간 마을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하귀리는 일제가 1935년 야학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강문일, 박영순, 김 홍규를 구속한데서 보듯이 항일운동이 왕성했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해방 후에도 항일민족의식이 면면히 이어졌다. 마을 유지와 청년들은 1945년 10월 하귀중학 원(학원장: 고창옥)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시작하며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런 하귀리를 경찰은 불온시하여 탄압했다. 하귀리와 경찰 간의 본격적인 대립은 1947년 3월 1일 발생한 3·1절 발포사건 직후 시작됐다. 3·1사건 직후 전도에 걸 쳐 검거선풍이 일었다. 하귀리에서는 김용관 하귀국민학교 교장이 검거돼 체형 6 개월을 언도받았다. 그 후 후임으로 북한 출신 교장이 부임했다. 학생들은 이에 맞서 동맹휴학을 벌였고, 미군정은 이러한 마을의 움직임에 탄압을 계속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