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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당시 제6여단 유격대대원을 태운 군함은 애월항이 규모가 작아 입항을 하지 못하 자 보트를 내려 군인들을 상륙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고로 군인 몇 명이 익 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애월 주민들은 그 후 군인들이 이 일에 대한 분풀이로 애 월지서에 수감되어 있던 소개민을 1949년 2월 17일 학살했다고 믿고 있다. (아래 학살터-애월 남문 서쪽 밭, 참조) 제6여단 유격대대원들은 약 3개월 동안 애월국민 학교에 주둔하면서 무장대 토벌에 적극 참여하다 철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장동석(2003년 75세, 남, 곽지)은 오현중학 교에 다니다 학련에 쫓기게 되자 고향집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 그러다 부친이 장씨에게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자수를 하자고 권유했다. 장씨는 애월국민 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6여단 유격대대로 가서 자수했다. 장씨가 당시를 증언했다. “육군 소령 이원익이 대대장이었습니다. 대대장은 ‘우리가 있는 한 네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 그러니 집에 가 있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집에 가면 붙잡혀 죽는다 고 군에 입대하겠다고 사정했습니다. 결국 나는 부대 정보과 군속으로 일하게 됐습니 다. 당시 제6여단은 1개 대대 약 350명 정도 병력이 주둔했습니다. 애월국민학교의 본 부 병력은 30여 명 1개 소대 규모였다. 나는 장비 정리, 식사 당번, 청소 등의 일을 하 애월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