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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 애월면 박○원은 1947년 7월 15일, 일반재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 았다. 그리고 이어 1948년 8월 24일, 일반재판에서는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혐의는 무장대 연락책으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1949년 3월 4일에 석방됐지만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부인 이주순과 함께 목포에 있는 염전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는 몇 달 후에 영암경찰서에 다시 연행됐다. 그리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일에 대해 그의 조카인 박홍종은 그와 3~4차례 편지 왕래가 있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연락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그는 첫 출소 후 아직도 4·3이 끝나지 않은 제 주도로 귀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 땅 어디에도 없었다. 4·3의 소용돌이는 끝까지 그를 그대로 놓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애월리에는 한국전쟁 후 발생한 예비검속 희생자들도 많다. 현재까지 12 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지식인층으로 마을 유지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바다에 수장되었거나 총살돼 제주국제공항에 묻혔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김 두희(32, 남), 김주담(34, 남), 문창래(72, 남), 문창래의 아내(연령미상, 여), 문창 연(45, 남), 박중석(23, 남, 애월중학교 교사), 이병근(44, 남, 애월리 구장), 이시 형(33, 남, 제주농업학교 교사), 이한익(27, 남, 애월중학교 교사), 이한형(20, 남), 장기방(35, 남, 민보단 감찰위원장), 장시현(30, 남, 의사)이다. 현재까지 애월리에서 4·3희생자로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모두 59명(남성 55 명, 여성 4명)이다. 1) 학살터 ① 동상동 묵은장터 옛터 가. 소재지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