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6page

768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제주신보』, 1947년 4월 2일 구좌면 우도사건에 대하여 제주 경찰감찰청에서는 (3월) 30일 사건 전모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3월 4일 하오 1시경 우도 도민 약 1,000여 명이 3·1사건에 관 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하오 6시경에는 민청간부 모 외 수 명이 파견소에 나타나 게시판을 파괴(투석)하고 시위에 참가 않았다는 이유로 국민학 교 간판까지 파괴하는 일이 있었다. 이날 동 파견소 김 경관이 이날 살포중인 삐라를 압 수하여 보관 중 수 명이 동 순경 사택을 습격하여 ‘삐라를 반환하라. 불연이면 죽인다’ 고 협박함에 동 순경은 부득이 반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 사건이 발생한 후 10일이 지나서 파견소 직원의 보고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급행한 경관대는 즉시 수사망을 풀 어 주모자 대부분을 체포하였다. 1948년 3월, 우도경찰파견소는 우도지서로 개칭됐다. 초대 지서장에는 한림면 동명리 출신 양태수 경위(27)가 임명됐다. 당시 우도지서에는 서청 경찰들도 있 어 우도 주민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그 즈음, 연평리민 이두삼(43)이 사상범을 보 호하였다는 이유로 가택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우도지서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3월 23일 사망했다. 1948년 6월 16일, 양태수 우도지서장은 배를 타고 제주읍으로 향했다. 이 배는 항해 도중 갑자기 몰아친 갈바람으로 뱃머리를 가까운 북촌으로 돌렸다. 당시 이 배에는 양태수 경사와 진남호 순경(23세, 인천 출신)을 포함해 15명이 타고 있었 다. 서장은 이즈음 고기떼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이 소리에 놀란 북촌 주민들이 포구에 모여들었다. 배가 북촌 포구에 닿자 청년들이 배 위에 올라가 양경사를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고 진순경에겐 총상을 입혔다. 그런 다음 배에 있던 사람들을 끌어내 납치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9연대 군인들이 구해냈다. 진남호 순 경은 부상 후 도망치다 잡혀 살해됐다. (북촌리-역사현장-북촌리포구, 참조) 당시 희생된 지서장 양태수의 4·3희생자 신고서에는 “제주4·3사건 당시 우도지 서에 근무하였으며, 1948년 6월 16일 조천면 북촌포구에서 무장대에 피습 당해 조천리 해안가에서 배 닻에 메인 채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기재돼 있다. 그 후 1949년 1월 21일, 우도지서(지서장 부영빈)에서 다시 한 번 처참한 사건 이 터졌다. 이날 연평리의 구장으로 3·1사건대책위원장을 지냈던 차두옥이 며칠